“···문명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은 문명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체가 전부 다른 존재라는 점이다. 내가 앞서 다르다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개체의 형태나 생김새 따위의 차이가 아니다.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개체의 차이는 개체가 지닌 사상, 이념 등이 전부 상이하여 완벽히 일치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개체의 차이’가 문명이 언젠가는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궁극적인 과제와 문제점으로 여기고, 이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 이 논문을 작성한다.”
...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있던 자동차는 장난감 자동차뿐이었다. 우리 집을 비롯한 대다수의 집들이 그랬다. 진짜 자동차를 갖고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몇몇 집들에는 ‘진짜’ 자동차가 대여섯 대씩 세워져 있었다. 그 집에 사는 어른들이라곤 단지 두세 명뿐이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이런 도시에서 태어났다. 가난함과 부유함 사이의 계층을 찾아보기 힘든 심각한 양극화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몰랐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모두가 자동차를 굴릴 수 있었고, 모두가 의사가 될 수 있었다. 때때로는 주부나 요리사가 되거나, 과학자나 연예인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아가 형성되고, 그 새하얀한 것이 사회와 환경의 색채에 물들어간 이후에는,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남들은 자신과 비교했을 때 어느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이 과정이 좋든, 싫든 간에 사회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이를 겪어야만 했다.
덕분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진짜’ 자동차를 가진 집에 태어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집에 태어난 아이로 나뉘었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나 주부, 요리사와 과학자와 연예인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이것들을 할 수 있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로 나뉘었다.
나는 대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쪽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다른 다수의 아이도 그런 편에 속했다. 무언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이들의 수는 언제나 적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소수라고 해서 그들이 절대로 약자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나 다수보다 훨씬 강한 쪽이었다. 나를 포함한 무리는 그런 쪽에게 언제나 패배해야 했다. 공정하지 않은 심판이 어느 한쪽의 팀을 편애하는 것 같았다. 이 도시에서 아이들은 앞으로의 운명을 부여받은 채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자주 이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부모님께 자동차를 구매하자고 조르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집이 더 많다며 나를 꾸짖었다. 대다수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우리도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는 없다는 식이었다.
부모님의 꾸중을 듣고 난 뒤에는 언제나 밖으로 뛰쳐나가 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리는 자동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의 꾸중을 비틀어 ‘모두가 똑같이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부모님께 자동차를 사달라고 조를 필요도 없었고, 나와 다른 아이들이 자동차를 가진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해 눈물 흘릴 일도 없었다.
저 수많은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웠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을 위한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호주머니에 항상 조그만 장난감 자동차를 넣어두었고, 그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난 이런 일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주제를 모르고 수레바퀴에 맞서다 짓눌리는 멍청한 사마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수레바퀴를 피할 줄 알아야 했다. 분수를 알고, 풀숲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남들이 하는 양보다 항상 많은 양의 공부를 했다. 공부를 내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여겼다. 아무리 풀숲에서 살아가더라도, 다른 곤충들에게 잡아먹히는 피식자의 위치에 있는 것보다는 포식자의 입장이 분명 나을 것 같았다.
이 방법은 어느 정도, 아니, 굉장히 유효했다. 덕분에 나는 부모님께 값비싼 트로피와 훈장이 되어드릴 수 있었다.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간에 우리 집에도 남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 정도는 생겼다.
집안의 형편이나 의식주 따위에 대한 불편하고, 쿰쿰하고, 칙칙한 이야기는 이제 내가 시험에서 받은 점수와 학교에서의 등수, 학교와 대회에서 타낸 상장에 관한 이야기에 자연스레 가라앉았다. 더 이상 모든 경쟁에서 패배해 기가 죽어야 할 일은 없었다. 나는 남들과 비교해 어느 방면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쟁취하고 있었다.
가끔 선생님과 아이들의 칭찬이 들려오거나, 높은 단상에 나가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장을 받은 뒤 ‘유명하고 대단한 분들’과 손을 맞잡은 채 악수를 나눌 때는, 나와 우리에게 언제나 패배만을 안겨줬던,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아이들의 모습과 냄새가, 정말 내게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 들 때면 이따금 호주머니 속의 작고 볼품없는 장난감 자동차 따위가 아닌 ‘진짜’ 자동차가 바로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이것이 그저 환각이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된 일은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나는 도시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비가 비싸서 안 된다느니, 다른 고등학교에 가도 배우는 것은 똑같다느니 하는 부모님의 말씀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장학금을 받거나,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스스로 돈을 벌어서라도 그 이름난 고교에 진학하겠다며 내 뜻을 관철했다. 부모님은 이런 내 의지를 끝내 꺾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사립 고교 진학을 허락하셨을 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쓰인다는 걸 배웠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하고 난 뒤에 든 생각은 이곳이 내가 상상했던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교에 입학한 학생들 모두 같은 취급을 받지 않았고,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가난한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로 나누어졌다.
우스갯소리로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을 찾으려면 차림새가 꼬질꼬질한 학생들을 찾으면 된다는 말도 떠돌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우스갯소리가 단순히 농담이나 소문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유효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꼬질꼬질’한 쪽에 속했다. 고교에 입학하기 전 내게서도 나타났던 ‘승리의 모습과 냄새’ 같은 건 단순히 내 허황된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학생이라고 해도 전부 꼬질꼬질한 차림새를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레스터’라는 친구가 그랬다. 그 친구의 집에는 돈이 많았다. 그 친구는 학교에 항상 커다랗고, 검고, 반짝거리는 자동차를 타고 왔다. 도시에서 부유하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난 여러 집을 찾아봐도 쉽게 보기 힘든 그런 자동차를 매일 같이 타고 등장했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레스터는 나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흔히 동화책이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왕자님’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분명히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레스터는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장학금 같은 건 절대로 필요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아직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게 남아있는지, 혹은 다른 아이들과의 어떤 경쟁에서라도 패배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공부를 지독하게 열심히, 또 단순하게 열심히 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주 잘했다.
덕분에 어쩌면 공부라는 것도 처음부터 타고난 재능의 영역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능’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노력’을 했다면, 레스터는 ‘재능’이 있는 상태에서 ‘노력’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드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또다시 모든 경쟁에서 도태되는 패배자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참가하고, 성실히 임했다. 공부, 시험, 대회, 행사, 학생회 업무 등은 물론이고 인사와 청소, 봉사활동 같은 자잘한 것들에도 열정을 갖고 임했다. 장학금만으로 부족한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이런 행동들이 단순한 열정이 아닌 승패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됐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최고’라고 인정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최선’ 뿐이었다.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가난한 아이’라는 꼬리표가 내 뒤에 따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심장이 터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무시당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는 삶을 바쳐야 했다. 나는 레스터를 따라잡고 싶었다.
가끔 레스터는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다니엘, 너무 무리하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걸.”
그의 말에는 언제나 여유가 담겨있었다. 여유를 가진 자가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자에게 건네는 악의 없는 덕담은 언제나 오지랖과 동정심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래서 항상 무표정으로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나의 무례한 대답에도 레스터는 항상 나를 응원했다.
“하긴, 그렇겠지? 그럼 힘내!”
레스터는 나를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나는 학교 시험이 있는 날 아침, 길가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하얀 낯선 천장이었다. 내 옆에는 부모님이 앉아 계셨다. 꾀죄죄한 몰골을 한 채로. 오늘이 시험이었다는 걸 가까스로 생각해 낸 나는 곧바로 기겁하며 병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시험을 봐야 했다. 부모님께서 나를 제지하려 했지만, 나는 그것을 뿌리쳤다.
하지만 창 너머를 바라본 나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바깥은 이미 밤이었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왜인지 모르게 눈가 주변이 뜨거워졌다.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입원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대로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결국 아무리 내가 노력한다 한들, 절대로 레스터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몸을 혹사해서라도 모든 일에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고 한들, 그보다 여유롭게 무언가에 매진할 수 있는 시간 같은 건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에 실패했을 때의 부담감은 상상조차 하기 버거웠지만, 그가 무언가에 실패했을 때는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좋은 회사에 다니고, 높은 명성을 얻는다고 한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쥐고 있었던 재산과 명성만큼을 갖는 일은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레스터와 나는 같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레스터의 밑에서, 황새를 쫓아가기 위해 다리를 찢어대는 뱁새일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레스터가 굴리는 수레바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마귀일 뿐이었다. 뱁새인 내가 아무리 다리를 넓게 찢더라도 황새가 될 수는 없었다. 사마귀인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수레바퀴를 막아설 방법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이 너무도 우습고, 한심하고, 초라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절망감과 억울함을 비롯한 온갖 나쁜 감정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꾀죄죄한 모습으로 병실에 찾아온 어머니와 아버지가 너무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을 내가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끝내 나는 안간힘을 써서 겨우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셨지만, 아무것도 듣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환멸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리가 계속해서 욱신거렸지만, 그보다도 당장 어디론가 도망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 버틸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빠져나와 도로가 보이는 길가에 쪼그려 앉은 채 빨갛고, 또 하얀 불빛을 뿜어내며 달리는 자동차들을 바라봤다. 내가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고민했다. 겨우 멋진 자동차를 장만하는 것이 내 인생의 이유이자 목표인 걸로 충분한 것인지를,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직장을 다니다, 조금 더 좋은 대우를 받고 내 삶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아닐 것 같았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저 모든 걸 이루고 나서, 나는 도대체 뭐가 되는 걸까.
내 삶이 끝나고 나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기는 할까?
···아마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레스터와는 다르게.
난 대다수에 속한 아주 평범한 인간이니까.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백조가 아니니까.
난 그저 볼품없고, 시끄럽고, 더러운 닭 중··· 하나일 테니까.
···누군가와는 다른···.
···
···
···
아니.
왜, 왜 내가 이런 거지 같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모두가 백조가 될 수 없다면,
모두가 닭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두 오리가 된다면 어떨까?
닭보다는 우아하고, 백조보다는 못생겼더라도,
적어도 모두가 백조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잖아.
적어도 모두가 닭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거 아니야.
···
···전부.
···전부,
···전부.
나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장난감 자동차를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호주머니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그 낡아빠진 장난감 자동차를 바닥에 떨어트린 뒤,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동차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잘게 부서진 자동차 조각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면, 아무도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누군가를 무시하지 않을 터였다.
나의 신념은, 그렇게 시작됐다.
···
“···다니엘? 몸은 좀 괜찮아? 등굣길에서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어.”
“정말? 다행이다. 엄청나게 걱정했거든! 아, 네가 맡아야 했던 학생회 업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랑 다른 친구들이 전부 처리했으니까. 아무튼, 돌아와서 진짜 다행이다. 그러게, 내가 항상 쉬엄쉬엄―”
“레스터.”
“어?”
“가장··· 이상적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갑자기? 글쎄···.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그런 세상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너무 교과서적인 대답이었나? 그런데 이건 갑자기 왜?”
“···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책에서 나온 내용이야? 아니면 누가 너한테 물어본 거야?”
“아니, 그냥. 계획이 하나 생겼거든.”
“계획? 무슨 계획?”
“···아주··· 원대한 계획.”
···
···
···
“다니엘, 다시 한번 생각을···.”
“전 이미 정했어요. 정치학과로 진학할 거예요.”
“다니엘···, 네가 정치학과에 들어가서 뭘 배울 건데, 도대체? 응? 커서 정치인을 할 거야? 아니면 공무원? 엄마가 다니엘 성적이면 충분히 다른 학과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대기업 갈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응?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우리 아들? 아들···, 원래, 원래 엄마 말 잘 들었잖아, 우리 아들 이렇게 부모 말 안 듣는 나쁜 아들 아니었잖아···.”
“···됐다고요. 제 인생이잖아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요.”
“다니엘, 너 지금 그게 부모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어? 지금까지 너 공부시켜 주려고 나랑 네 엄마가 얼마나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제 와서 네 멋대로 하겠다는 거야? 이 새*가 오냐오냐 키워놨더니만···!”
“···그러니까 누가 당신들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냐고!”
“···!”
“그럴 거면··· 그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낳아놓지를 말던가···!”
“너 이 새*―”
“닥쳐! 더 이상··· 당신들 자식으로 살기 싫으니까! 전부 역겨워 죽겠다고! 이 좁고 칙칙하고 냄새나는 돼지우리 같은 집구석도, 너덜너덜하고 구멍 뚫린 옷들도 전부 짜증나고 한심해서 구역질 날 것만 같아 미쳐버리겠다고···!”
“다니엘···! 너 지금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
“시끄러워···, 시끄러워···! 난 이제 당신네들 얼굴 안 보고 살 거니까, 앞으로 연락하지도 말고···, ···찾지도 마, ···알았어···?”
“···.”
“다, 다니엘···!”
···
···
···
“···저, 다니엘 씨?”
“···네? 아, 네.”
“아이고, 무슨 생각에 그렇게 깊게 빠져 계세요?”
“···그냥 옛날 생각이요.”
“아, 가끔 유독 옛날 생각이 날 때가 있죠. 햐, 저도 학창 시절이 그립네요. 친구들은 잘 지낼런가···. 통, 연락이 없으니 원. 옛말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곤 하지만.”
“···공사는 잘 끝난 건가요?”
“아, 맞다. 이 건물이 옛날에 뭐 실험실인가, 공장인가, 아무튼 그런 쪽으로 쓰였던 건물이라는데, 내부는 뭐 깔끔하고 그래서 공사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비용도 적게 들었고. 그리고 아무리 도시랑 떨어진 외곽이라고 해도 이렇게 큰 건물이 이 정도로 싸게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사장님, 진짜 땡잡으신 겁니다.”
“···잘 됐네요.”
“아이고, 그럼요. 좋은 게 좋은 거죠. 아무쪼록 잘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아, 무슨 용도로 사용하신다고 그러셨더라?”
“···원대한 계획··· 을 위해서요.”
“···아···. 원대한 계획이라···. 저도 젊을 때는 그런 낭만적인 걸 갖고 있었죠. 사장님의 원대한 계획,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성공이라···.”
···
···
···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를 배워 끝내 박사 학위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사회에서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내 꿈은 단순히 박사가 되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신념에 대해 여러 논문을 쓰고, 사비를 들여 저서를 출간했다. 덕분에 잘 나간다고 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지만, 아예 못 나간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입지 정도는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입지뿐만이 아니라, 나의 사상에 매료되어 나와 함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이들과 언젠가는 일으킬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도시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폐건물을 매입해 우리들의 기지를 세웠다. 기지라고 하기엔 아직 많은 것들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기지는 기지였다. 기지에서 나와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스터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텔레비전에서 등장했다. 처음에는 레스터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라는 생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도 박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나와 같은 분야에서.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왜 하필이면. 내가 유일하게 너한테서 승리할 수 있었던 종목마저, 넌 이리도 쉽게 빼앗아 갈 수 있는 걸까.
···
···그래, 사실 처음부터 넌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의 삶 따위는 평생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는 네가, 왜, 어째서? 정치나 사상 같은 게 너한테 중요한 이유가 뭔데, 도대체. 넌 그냥 부모님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기만 해도, 부족할 것 하나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몸이 지쳐 실신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사람이잖아. 그런데, 네가 뭐가 부족해서? 네가 뭐가 못났다고? 왜 하필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걸 앗아가는 건데?
···
···아니다. 어차피 내가 만들 세상에선, 전부 의미 없을 테니까. 우리가 세울 새로운 세상에서는 아무도 열등감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썩어가지 않아도 될 테니까.
고마워, 레스터. 덕분에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편안함에 빠져 잠시 잊고 있던 내 본분을, 다시금 상기하게 됐어.
···
···
···
기지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도시로 갔던 차에, 하필 레스터를 만났다. 평소에는 필요한 물품들을 기지로 주문했지만, 택배 회사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주 동안이나 파업 중인 바람에 직접 도시로 가야만 했다. 덕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당연히 모른 척 지나가려 했지만, 레스터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니엘! 다니엘 너 맞구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다니엘! 아, 너희 부모님께 이야기 들었어, 정치를 공부하겠다며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 너라면 의사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업할 줄 알았는데, 네가 정치를 배우겠다고 했다는 너희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나도 정말 놀랐다니까.”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나의 숙적이나 마찬가지인 레스터가 그 돼지우리나 다름없는 곳에 직접 찾아갔다는 사실이, 그곳에서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삶을 배우며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치욕스럽고 싫었다.
“다니엘, 그러지 말고 이제라도 부모님께 사과드리는 건 어때? 만약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싫다면, 내가 같이 가줄 수도 있어. 내가 몇 번 인사를 드리러 갔었으니까, 내가 같이 가면 화를 내시진 않을 거야.”
나는 레스터의 말에 무어라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만 서면 무슨 말이든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전부터 그에게 자주 했던 말을, 이번에도 크게 다를 것 없이 기계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 전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자 레스터는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하긴, 너는 언제나 그랬지. 하지만 너 혼자 모든 걸 짊어질 필요는 없어. 가끔은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 생각해 보니, 난 언제나 다니엘 너한테 도움을 받기만 했네. 아, 그래서 말인데···.”
“···?”
레스터가 그에게 걸맞는 고급스러운 가죽 지갑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것은 명함이었다.
“여기, 내 지인의 명함인데, 이분이 널 이 회사에 윤리 부문 자문단으로 추천해 주실 수도 있어. 넌 똑똑하잖아? 맞다, 나 네가 쓴 책이랑 논문도 전부 읽어봤어.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가 쓴 내용들은, 뭐랄까, 너무··· 이상주의적인 것 같더라. 뭐, 논문이랑 책에 담긴 게 너의 진짜 사상은 아닐 테니까. 아무튼, 넌 아마 윤리나 철학 같은 분야에도 조예가 깊을 테고···, 그래서 널 만나면 항상 이걸 알려주고 싶었는데, 널 만날 기회가 없더라. 고등학교 동창회에도 나오질 않고, 네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도 없더라고.”
그가 건넨 명함에는 ‘●●● 코퍼레이션’이라 적혀 있었다. 그러나 어느 회사든지 간에 그런 건 딱히 중요치 않았다. 알 수 없는 모멸감이 나를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가 나의 사상을 모욕한 것도 모자라, 그게 내가 가진 사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나를 일자리가 필요한 백수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피부 위를 마구 기어다니는 듯한 모멸감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레스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뭐가···?”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냐고, 도대체.”
“···다니엘? 무슨··· 말이야···?”
“···지금 나 동정하는 거야? 네 눈엔··· 지금 네 눈엔 내가 불쌍해 보여? 내가 회사에 취직도 못 해서 빌빌거리는 폐인으로 보이냐고.”
“···아니야, 다니엘, 난 절대로 그런 게―”
“시끄러워. 난 이딴 명함 필요 없어. 너만 잘나가는 줄 알아? 너만 책 잘 팔고, 방송 자주 나가는 스타 박사인 줄 아냐고. 넌 맨날 그런 식이었어. 항상 남들 눈치 같은 건 안 보고, 네 멋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기주의자였다고. 네가 정말 날 친구라고 생각했으면, 네가 정말로 날 신경 써주고 싶었으면···! 이딴, 이딴 종이 쪼가리 같은 걸 내밀면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는 말았어야지···, 그게, 그게 맞는 거겠지!”
“다니엘···! 아니야, 난 정말 순수한 마음에···!”
“넌···! 넌 그게 제일 문제야···, 악의가 절대로 없다는 거. 항상 제 딴에는 남을 위한다는 생각에 행동하고, 지껄였겠지만···! 그게 제일 나쁜 거라고, 그게 제일 엿같은 부분이라고! 나랑 내 부모에 대해··· 네가, 네가 도대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내 사상이, 내가 책과 논문에다 쓴 내용이··· 뭐가 어쨌다고···? 이상주의적···? 그 내용이, 내 사상이 아닐 거라고? 레스터 넌 그 모든 내용이 유토피아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니, 아니, 아니. 절대로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게, 평생 고생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온실 속 화초나 다름없는 네가 생각하는 게···! 항상 정답이고, 항상 옳은 건 아니라고···! ···알아들어···?”
···
“···다니엘.”
“···.”
“난 진심으로, 널 모욕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 그냥··· 지인의 회사에서 윤리 부문 자문단을 모집하고 있기에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해서 네게 말해줬던 것뿐이야.”
“······.”
“그리고 네 부모님에 대한 건, 네 부모님께서 너를 정말 간절하게 찾고 계셔서 내가 찾아뵀던 거야. 또 내가 네 사상에 대해 말한 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실현되기가 너무 어려운 내용들이라서 그랬던 거야. ···만약 내가 너한테 한 말이 너와 네 부모님 사이에 대한 걸 멋대로 판단하고, 네 신념을 무시하려고 한 것처럼 들렸다면, 내가 했던 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할게.”
“·········.”
“···다니엘.”
“············.”
“···난 너를···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했어.”
“···············.”
“···그거 알아? 내가··· 정치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
“··················.”
“···다니엘 너 때문이었어. 네가··· 나한테 물었었잖아.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난 너한테··· 확실한 대답을 해주고 싶었거든. 그래서··· 응, 그래서 그랬던 거야.”
“·····················.”
“···미안해.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난 아직··· 너한테 해줄 대답이 잘 떠오르지가 않네. 앞으로는··· 네 앞에 안 나타날게.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
···
···
···
“···다니엘 씨? 진심··· 이세요? 이 정도 인원으로는 어림도···.”
“···그냥···, 그냥 좀 제 말대로 하면 안 될까요? 네?”
“···다니엘 씨. 이건 다니엘 씨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성급하게 행동하면 전부 헛수고가 될 거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다시 신중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냥 좀···!”
“···!”
“그냥, 제발 좀··· 제가 하자는 대로 해달라고요. 여기 있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일이잖아요. 지금이 바로 적절한 때고, 절대, 절대로 실패 안 할 거라고요···. 모두가 평등을 위해 우리와 함께 나설 거라고요···!”
“···죄송하지만, 전 따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전 이만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도, 이건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안녕히 계세요.”
“···.”
“···다니엘 씨, 전 하겠어요. 분명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따를 거예요.”
“···저도요. 저도 할게요.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요.”
“······.”
“다들 주목! 다니엘 씨가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 무기와 깃발을 준비해라!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우리는 모든 계급을 파괴하고, 죽어서라도 새로운 세상을 세운 혁명가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우와아아!”
“혁명이다!”
“계급 타파! 평등을 위해!”
“평등을 위해!”
“평등을 위해!”
···
···
···
“펴··· 평등을 위―”
‘탕-!’
“···이해가 안 가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대놓고 테러라니.”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지.”
“어휴, 뭐 언제는 안 미쳐 돌았나. 이제부터는 또 주동자 찾겠다고 다들 개고생들 하겠네. 테러범들, 전부 사살한 건 아니지?”
“어. 강하게 저항하는 몇 놈들만 사살했고, 투항한 놈들 몇은 이미 본부로 넘겨졌어. 수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러게, 그냥 난리 치지 말고 조용히 살면 서로 편하고 얼마나 좋아. 사람이··· 씨, 쯧, 분수를 알아야지.”
“앞으로는 수사반 애들이 뺑이칠 텐데 뭐. 여긴 현장 처리반에 맡기고, 우린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오늘따라 아침부터 선짓국이 당기네.”
“아유, 그래, 밥이나 먹으러 가자.”
···
···
···
“경찰이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마루구에서 벌어진 폭동이 테러 조직에 의해 벌어진 테러 행위라고 발표했습니다. 폭동은 경찰이 출동한 지 몇 시간 만에 폭동에 가담한 테러범 전원을 체포 및 사살하며 시민과 경찰 측 모두 사상자 없이 상황은 마무리됐습니다. 또한 경찰은 이 테러의 주동자를 찾기 위해 수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잇달아 곳곳에서 아이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며···.”
“···실패네요, 다니엘 씨.”
“···.”
“···후···. 궁금한 게 있는데··· 다니엘 씨는 진짜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는 길에 따라오는 차나 사람은 없었으니까. ···물론 혁명에 나갔던 우리 조직원 중 몇 명이 경찰에 붙잡혔고···, 또 겁에 질려 자수했으니···, 언젠간 이곳도 세상에 밝혀지겠죠.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
“···전 자수하러 갈 생각이에요. 보시다시피 이미 많이 다쳤고, 딱히 돌아갈 곳도 없고, 도망자 신세로 살기도 싫고···. 다니엘··· 씨는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언제나 그랬듯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부디 안녕히···.”
“···.”
“···있죠, 다니엘 씨.”
“······.”
“저··· 그래도 즐거웠어요. 살기 힘든 세상 속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편안하고, 안심되는 일인지도 알게 됐고요. ···비록 모든 게 헛수고가 됐지만···, 전···, 후회는 하지 않아요. ···고마웠어요, 다니엘 씨.”
···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도 아주 보기 좋게. 조직원을 비롯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할 거라 굳게 믿었던 내 신념이 부서졌다. 아주 보기 좋게.
우리의 혁명은 단순한 테러 행위로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가 어떤 세상을 세우고 싶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
···
···어째서일까.
···왜, 도대체 나는.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걸까.
···
내 사상이 너무도 이상적이라 실현될 수 없다고 했던 레스터의 말이 떠올랐다.
레스터가 또다시 내게서 승리한 걸까.
···
···
···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겠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오더라도, 분명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를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백조들은 오리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닭들은 서로가 어떻게 되든 ― 굶어 죽든, 얼어 죽든, 분쇄기에 갈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든 ― 간에 전혀 상관하지 않겠지. 모이를 쪼아먹느라 바쁠 테니까. 자기만 괜찮으면 되는 거니까. 자기만 잘 살면되는거니까.자기만행복하면되는거니까.자기만살아있으면되는거니까.자기만무시당하지않으면되는거니까.자기만생각하면되는거니까.자기만.자기만.자기만.오직자기만.오직자기만.오직자기만.오직자기만.
···
···그러면, 모두가 하나가 되면?
모두가 오리가 될 필요 없이, 모두가 합쳐져 백조정치인오리상장돼지과학자직박구리어머니소닭부자참새의사황새왕자님독수리경찰자동차주부사마귀공무원뱁새아버지훈장두루미거지비둘기연예인개미선생님박새심판수레바퀴요리사타조트로피올빼미가 된다면?
그러면 한 명이 욕심을 부리더라도, 모두가 욕심을 부린 게 될 텐데.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것도, 모두가 잘 살려고 하는 게 될 텐데.
나만을 신경 쓰려는 것도, 모두를 신경 쓰려는 게 될 텐데.
···그런 거구나.
모두가 합쳐진다면, 절대로 틀릴 수 없는 거구나.
소외감을 느낄 필요도, 가난에 허덕일 필요도,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 할 필요도 없는 거구나.
세상에, 난 얼마나 바보 같았던 걸까.
이렇게 좋은 방법을 눈앞에 둔 채로, 지금껏 바보같이 방황하기만 했으니.
···
레스터, 듣고 있어?
난 찾아냈어,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 뭔지.
그러니 조금만 도와줄래?
···
나의 두 번째 신체가 되어줄래?
나의 두 번째 심장이?
나의 두 번째 두뇌가?
나의 두 번째 위장이?
나의 두 번째 허파가?
나의 두 번째 두개골이?
···
···
···
‘띵동-’
“누구세요?”
“···나야, 레스터.”
···
“···다, 다니엘? 여긴 무슨 일로···.”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나와줄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
···
···
“···다니엘,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줘···.”
“레스터, 내가 너한테 물었던 거 있잖아.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다니엘, 제발···.”
“난 찾아냈어. 모두가 하나가 되면 돼.”
“다니엘···, 제발 정신 차려···, 넌 제정신이 아니야, 제발···.”
“걱정하지 마. 너도 금방이면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거야.”
“···다니엘···.”
“모두 하나가 될 테니까―”
‘탕-!’
“손 들어! 경찰이다!”
“반복한다, 놈이 있는 곳을 찾았다. 지원 요청 바람.”
“든 거 내려놓고 손 들어!”
···
···난 이제부터 시작인데.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지. 모든 갈등과 아픔을 해결할 방법의 시작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이제서야 막 열릴 참인데.
···난 절대로 포기 못 해.
“···절대로.”
“투항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절대로.”
“하나!”
“절대로.”
“둘!”
“절대로.”
“셋···!”
“절대로!!!!!!!!!!!!!!!!!!!!!!!!!!!!!!!!!!!!!!!!!!!!!!!!!!!!!!!!!!!!!!!!!!!!!!!!!!!!!!!!!!!!!!!!!!!!!!!!!!!!!!!!!!!!!!!!!!!!!!!!!!!!!!!!!!!!!!!!!!!!!!!!!!!!!!!!!!!!!!!!!!!!!!!!!!!!!!!!!!!!!!!!!!!!!!!!!!!!!!!!!!!!!!!!!!!!!!!!!!!!!!!!!!!!!!!!!!!!!!!!!!!!!!!!!!!!!!!!!!!!!!!!!!!!!!!!!!!!!!!!!!!!!!!!!!!!!!!!!!!!!!!!!!!!!!!!!!!!!!!!!!!!!!!!!!!!!!!!!!!!!!!!!!!!!!!!!!!”
‘탕-!’
···
···
···
···모든 게 어두워졌다.
···이렇게 죽을 순 없는데.
···이렇게 죽을 순 없는데.
···이렇게 죽을 순 없는데···!
“안타깝네.”
“···?”
“복수를 갈구하고 있지?”
“···당신은 누구지?”
“네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자, 그게 아닌 사람이기도 해.”
“···저승사자라도··· 되는 건가요?”
“아니, 아직은 아니야. 넌 지금 죽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경찰인가요?”
“너는 지금 잡히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 경찰은 아니겠지. 하지만 원한다면 난 경찰이 될 수도 있어.”
“···애매한 말만 늘어놓네요, 당신.”
“글쎄.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이지.”
“···.”
“넌 욕심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바꾸고 싶은 거야, 그렇지?”
“······.”
“아무도 소외당하지 않고, 가난에 허덕이지 않고, 타인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 어떤 개체도··· 틀릴 수 없는. 그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거야.”
“·········.”
“찬성이야. 네 투쟁이 완벽히 승리할 수 있도록, 또 다른 ‘다니엘과 레스터’가 더 이상 세상에 등장하지 않도록, 내가 도와줄게. 우리 함께 하자.”
···
···
···
“두려워할 필요 없어. 선택은 네 몫이고, 나는 그저 너와 같은 사람일 뿐이니까. 날 봐.”
···
···아름답네.
···
“···당신도··· 절망에 빠져본 적이 있나요?”
···
“물론.”
···
···
···
손을 잡아, 다니엘.
“···그럼 우리는··· 말이 꽤 잘 통하겠네요.”
"네가 원하는 모습은 뭐야?"
"..네?"
"네 생김새의 추구가 무엇인지, 그걸 물어보는 거야. 내가 다 바꿔줄거니까."
